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양 사태 (문단 편집) === '적성계급' 타도 운동 === 사태의 원인은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였지만 신양지위는 적성계급의 계략으로 여겨 1960년 12월 허난성 위원회와 중앙 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이번 사태는 10년 전 [[토지개혁]]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온 부농들이 혁명 진영에 들어가 세력을 회복하고 복수로 인민의 삶을 극도로 어렵게 했기에 벌어졌다. 따라서 토지개혁과 같은 교훈을 이루기 위해 철저한 민주혁명 단행, 지도부 장악이 필요하다. 마오쩌둥은 이를 배포, '좋은 문건'이라며 읽게 하고 사태의 원인이 적성계급의 계략이라 주장하며 권력 재탈환을 명령한다. 그로서 기세등등한 민주운동이 재개, 나라 전역에서 적성계급 타도 운동이 벌어져 현장들은 쫓겨나거나 체포되고 간부 수천이 조사를 받는다. 한편 신양의 각급 관료, 인민공사 간부와 공용급식소 회계사무장 20여만 명이 집결해 적성계급을 잡는다. 당시 사람들은 분노해있었기 때문에 [[반우파투쟁]]때보다 더욱 무서웠고, '반혁명 분자' 수만이 가족과 함께 적발되어 심한 박해를 받는다. 이런 운동이 끝나고 신양의 간부 문제가 '근본적으로' 확인된다. >1. '대약진', '공사회', '반복산' 중 '오풍[* 과장 보고, 엉터리 지휘, 부과풍, 공산풍, 강제명령풍]'을 일으키고 심각한 법률, 규율 위반에 직면했다. >2. 가짜 '위성'을 마구 띄워 하급자는 상급자를 속이고 상급자는 하급자를 호도했다. >3. 일부 부패관련들은 횡령에 재물을 더 많이 챙기고 여자를 강간했다. 지주와 부농의 여자를 '계급투쟁'으로 위협했고 처녀에게 식량표 2근과 찐빵 몇 개를 주고 성관계를 맺었다. 1960년 11월 3일 정부는 사유 텃밭 보유와 부업, 하루 8시간 휴식을 허용하고 시장을 부활시키는 등 대약진운동을 잠정중단한다. 루셴원은 1960년 11월 16일 징역 3년을 선고받는다. 출소 후 1983년까지 여러 공직을 지내고 1993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